AI·융합의 시대,
“마음을 묻는 질문에서 출발한 심리학, 미래를 설계하는 융합과학으로”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2004년 고려대학교 심리학과에 조교수로 부임한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실험실에서 보낸 기초 심리학자입니다. 실험실 연구는 우연한 발견을 기대하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고집스럽게 몰두하는 작업이어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조정해야 하는 행정이나 리더십의 역할과는 상당히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심리학자이기는 하지만, 제가 주로 연구해 온 학습 이론이나 뇌신호 분석은 현실의 문제 해결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학부장으로서 처음부터 많은 것을 새로 배우며 시작해야 하는 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뭐랄까요, 방랑하는 하이에나로 태어났는데 매일 성실하게 댐을 쌓아야 하는 비버가 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학부가 중요한
시기를 맞고 있는 지금 이 역할을 맡게 된 것이 사실 적지 않은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첫날부터 결재 서류가 쏟아지는데, 전혀 접해보지 못한 분야의 논문을 그것도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읽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히 믿는 것이 있었습니다. 저희 심리학부는 인화와 단결이 매우 잘 이루어지는 조직이라는 점입니다. 18명의 교수 모두가 학부에 필요한 일이 생기면 적극적으로 나서고 서로 협력하는 문화가 자리 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위원회를 구성할
때도 누구에게 부탁해야 할지를 두고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든든한 동료들을 믿고, 이 역할을 맡아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학부에서는 생물학을 전공했고, 1989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해 김기석 교수님의 지도 아래 생리심리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유학을 가서 행동 및 신경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생활을 했습니다. 이런 이력 때문인지 지금도 종종 ‘심리학자냐, 뇌과학자냐’는 질문을 받곤 합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심리학자들이 ‘심리학은 이과냐 문과냐’라는 질문을 받기도 하지요.
이런 질문들은 우리나라에 심리학이 도입된 지 100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으로서의 심리학이 아직 충분히 이해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2021년, 저희 학부가 우리나라 최초로 ‘심리학부’로 독립하고, 졸업생들이 문학사와 이학사 트랙을 선택해 이수할 수 있도록 한 결정은 매우 상징적인 변화였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이과와 문과를 오가며 방법론적·제도적 칸막이에 갇히지 않는 학문적 정체성을 추구해 왔고, 그 과정에서 심리학자는 물론 철학, 의학, 공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과 협력 연구를 진행해 왔습니다. 이러한 학제 간 소통과 협업의 경험이 학부를 운영하는 데에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필이면 심리학부가 출범한 이후, 융합 학문으로서의 정체성을 본격적으로 펼쳐 나가야 하는 시점에 제가 이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점에서 과학적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공명(resonance)을 느끼고 있습니다(웃음).”
“단연 저희 심리학부의 가장 큰 강점은 훌륭한 맨파워라고 생각합니다. 학부로서는 비교적 작은 규모인 18명의 교수진이지만, 한 분 한 분이 각자의 연구 분야에서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최고 수준의 연구를 수행하고 계십니다. 이런 표현이 다소 상투적으로 들릴 수 있어 비유를 들자면, 출전 멤버를 결정해야 하는데 후보 명단에서 뺄 선수가 한 명도 보이지 않는 전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연구 역량을 바탕으로 저희 심리학부는 현재 전국에서 유일하게 대규모 BK 심리학 사업단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매년 약 80여 명의 석·박사급 인재들이 안정적인 연구 장학금을 지원받고 있습니다. 학부생들의 수준 또한 해마다 꾸준히 향상되고 있으며, 특히 전공에 대한 애정과 몰입도가 높은 학생들이 입학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여기에 더해, 심리학부의 인재 양성 체계를 한 단계 더 확장하는 심리융합과학대학원이 3년 전 설립되어, 올해 첫 번째 졸업생을 배출했습니다. 심리융합과학대학원은 야간제 특수대학원으로, 다양한 직업군과 전문성을 지닌 구성원들이 심리과학과의 접점을 통해 성장할 수 있도록 국내 최초로 설립되었습니다. 매년 3대 1이 넘는 높은 경쟁률을 기록하며 우수한 인재들을 선발·교육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탄탄한 인재풀을 바탕으로 심리학의 진출 분야 또한 빠르게 확장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심리학이 주로 임상·상담 영역이나 기업의 인사 분야에서 주목받았다면, 이제는 자동차, 게임과 같은 첨단 기술 산업을 비롯해 데이터 사이언스, 휴먼 팩터, 신약 개발, 인공지능 등 다양한 영역에서 심리학 전공자들의 전문성이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볼 때, 저희 심리학부는 외형적인 인프라 측면에서 아직 부족한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학부의 위상과 역할에 걸맞은 물리적 공간이 충분히 확보되어 있지 않습니다. 현재 교수 연구실이 캠퍼스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어, 학부 단위의 연구와 행정을 유기적으로 운영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며, 학생 자치 공간이나 연구 공간 또한 충분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전기획위원회를 중심으로 심리학부 구성원 전체가 지속적인 논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학교 본부와도 상의하여 조만간 심리학부의 미래 성장과 연계된 마스터 플랜을 만들고자 합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는 교원 인력 확충입니다. 물론 인원은 많을수록 좋겠지만, 독립적인 학부로서 안정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전임교원 20명 이상의 규모, 즉 일정한 ‘크리티컬 매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로서는 모든 교수들이 연구와 교육뿐만 아니라 행정 역할까지 함께 수행하며 사실상 1인 2역을 맡고 있는 상황입니다.
행정실 직원들 역시 제한된 인프라를 높은 전문성과 헌신으로 보완해 주고 계시지만, 학부의 규모와 역할이 점차 확대되고 있는 만큼 보다 효율적인 행정 시스템과 제도적 지원을 구축하는 것이 앞으로의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심리학은 늘 ‘새롭다’는 꼬리표를 달고 다녀온 학문입니다. 현대 심리학의 기원을 분트(W. Wundt)의 실험실 개설로 본다면 150년 남짓한 비교적 젊은 학문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심리학이 언제나 미지의 영역으로 여겨져 왔던 인간의 마음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인지과학, 뇌과학, 인공지능과 같은 첨단 분야의 탄생과 발전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롭다’는 표현은 심리학이라는 학문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심리학이 이러한 특성을 바탕으로, 성숙한 융합 학문으로서 주변의 다양한 학문과 기술을 통합하고 체계화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심리학에는 그러한 역량이 충분히 축적되어 있습니다. 한때는 철학적 사유의 영역으로만 여겨졌던 인간의 마음을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탐구해 온 심리학의 이론과 방법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다양한 사회적·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도적으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심리학자의 활동 영역도 계속 확장될 것입니다. 전통적인 정신건강 분야는 물론이고, 디지털 기술과 결합된 새로운 영역—예를 들어 디지털 환경에서의 중독 문제나 인간–기술 상호작용과 같은 분야—에서도 심리학자의 역할은 점점 더 중요해질 것입니다. 특히 인공지능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전문가들조차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지만, 바로 이런 시기에 심리학이
기여할 수 있는 지점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지능의 본질을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체계적으로 연구해 온 학문이 심리학이며, 인공지능의 환각(hallucination)이나 아첨 (sycophancy) 과 같은 이상 행동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에도 심리학적 지식은 필수적입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미 저희 심리학부의 여러 교수들이 빅데이터, 인공지능, 디지털 치료제 등 첨단 연구 영역을 적극적으로 개척하고 있으며, 학생들 또한 이러한 변화에 능동적으로
호응하며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나 자기 전공이 가장 흥미로운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법학자는 법을, 건축학자는 건물을, 흉부외과 의사는 심장을 가장 흥미로운 대상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어떤 대상도 ‘흥미롭다’고 느끼는 마음이 없다면 대상이 될 수는 없겠지요. 그렇다면 그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요?
심리학을 전공하는 우리 모두는, 적어도 한 번쯤은 이런 질문을 던져본 경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바로 이 ‘궁극적인 호기심’에 대한 추구가 우리를 하나의 공동체로 묶고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지난 수백 년 동안 같은 질문을 품었지만 이를 과학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방법을 갖지 못했던 수많은 지성들과 비교할 때, 우리가 얼마나 그
해답에 가까이 와 있는지를 상기시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또한 조작적 정의와 통계적 개념에서부터 정교한 실험 설계, 뇌영상에 이르는 최신 연구 기법에 이르기까지, 심리학이 축적해 온 방대한 이론적·기술적 자산들이 비로소 의미를 갖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저는 심리학을 전공한 우리의 정체성이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끝까지 붙잡으면서도, 그 지식을 미래 사회의 실제 문제에 체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리학부는 그러한 인재를 길러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언젠가 우리 졸업생과 함께 일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별다른 설명 없이도 ‘아, 어쩐지’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순간들을 저는 꿈꾸고 있습니다.”